감상적 속물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길고 길고 긴 과학교양서 본문

鑑賞 : 작은 즐거움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길고 길고 긴 과학교양서

blueturtle46 2015. 4. 5. 01:26

빌 브라이슨 (2003)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이덕환 역). 서울: 까치글방.

 

 일단, 무엇보다도 약간의 지적 허영과 의무감에 의한 독서라는 게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깨우치게 해 준 점에 대해서 이 책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아아, 정말이지 전공수업 시간에 쓰는 개론서도 아닌 보통의 책 한 권을 읽는 게 이렇게 많은 도전과 끈기,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는 게 새삼 신기하면서도 징글징글하다. 1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폈다가 채 몇 페이지를 못 읽고 덮었다가 한참 후에 또 혹시 하는 마음으로 펼쳐서 다시 좌절을 경험하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이, 이 책에도 마지막 페이지라는 게 있었다. 정말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후에는 책을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당시 책을 보던 데가 비행기 이코노미 칸이라 책을 던질 만큼 팔을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이 책에게는 다행이었다.

 여하튼 이 책은 55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삽화도 단 한 장 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과학교양서이다. 그렇다. 과학. 너무나도 재미없는 중고등학교 과학책에도 그림이 있건마는, 작가 양반은 자신의 필력을 너무나도 자신한 나머지 독자에게 단 한 장의 삽화도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체 내용 중에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영화의 시나리오 같은 극적인 상황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양자역학, 화학, 고생물학, 지질학, 천체물리학 등등 머리 아파 마땅한 주제들을 다루는 상황에서도 굳이 그런 형식만을 고집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은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

 물론 이 책이 장점은 전혀 없고 유명세와 마케팅에만 편승한 책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물론 상당히 길지만) 재미있는 우주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친절하다고 투정했지만, 그러한 구성과 분량에도 불구하고 삽화 없이도 머릿속에 해당 장면들이 영화처럼 그려지는 에피소드들 또한 충분히 많다. 미국의 두 발굴학자가 사적인 감정싸움으로 각자의 연구를 망치는 부분은 코미디 영화의 대본을 읽고 있는 것 같았고, 클레어 패터슨이라는 지질학자의 일대기는 학자적인 고집과 인류애를 보여주는 드라마 같았다. 또 잘 알려진 아이작 뉴턴의 에피소드들도, 잘 알려진 그 이상으로 말도 안 되는 그의 지적 비범함이 충분히 흥미롭고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어주었다.

 또한 에피소드들이 가지는 재미 외에도, 이 책의 작가가 워낙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던 만큼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가진 재미나 세련됨은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장점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판구조론을 주장한 알프레드 베게너가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한 채로 그린란드 탐사 도중 사망한 것을 "그는 현장에 묻혔고,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물론 그가 사망했을 때보다 1미터 정도 북아메리카 쪽으로 움직여갔을 것이다"라고 서술하는 부분은, 대상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면서도 특유의 유머러스함까지 전달한 세련된 표현방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많은 가치 중 가장 큰 가치는 (두꺼운 책을 함부로 읽겠다고 덤비면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해서) 바로 겸손함이다. 작가가 500여 페이지를 통해 지구와 우주, 인체와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들까지 살펴보며 하는 이야기는 결국 겸손함이고, 삶에 대한 감사함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알아내겠다고 온갖 난리를 피워왔지만, 지금의 인류 문명이 알고 있는 건 단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변한다. 혹은 아무것도 모르거나"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라는, 태양과 적정한 거리를 가진 별에서, 산소를 마시며 생을 유지할 정도로 진화한 유기체로, 우주의 긴 시간 중 바로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적적인 일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보다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내 삶을 둘러싼 많은 조건들이 기적적인 확률적 우연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에서 생명이 나타나게 된 사건과 조건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건과 조건들은 여전히 특별한 것이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다른 이유를 찾게 될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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