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 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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鑑賞 : 작은 즐거움들

[일대종사] 아마도 어떤 전환점

blueturtle46 2014. 10. 16. 07:53

일대종사 / 감독: 왕가위 / 국내개봉: 2013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에서 왕가위가 보여주던 흐리멍텅하고 불안하고 왠지 우울하기도 한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 막연히 좋았다. '왕가위 스타일'이라는 말도 생길 정도였으니 그의 영상이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콩이라는 동네가 중국에 반환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당시 사람들의 혼란한 정서가 왕가위 영화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하더라. 어쨌든 저쨌든 결국 홍콩이란 동네는 중국에 반환이 되었고, 또 그 탓인지 아닌지 왕가위 이 양반의 스타일도 왠지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았다. 모든 건 변하는 거니까 변화 자체를 이렇다 저렇다 하긴 어렵지만,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의 영화는 볼 수 없어진 셈이니 어쩔 수 없이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이런 나의 아쉬움은 2008년에 왕가위가 내놓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라는 괴작(!)을 접하면서 기정 사실이 되어버렸다. 미국을 배경으로 재현되는 예전 그 '왕가위 스타일'의 이야기와 영상들은 찜찜하기 그지없는 이질감과 실망감을 남겼고, 단순히 왕가위 자신이 노라 존스의 팬이라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는 루머 또한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어버릴 만큼 구린 영화였다. 전성기에 대한 향수가 감독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건지, 헐리웃 자본이 왕가위 영화에 대한 이해 없이 감독의 네임밸류만 보고 영화를 만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 영화는 왕가위에 대한 나의 향수를 지워버렸다. 당시 홍콩이라는 동네와 그 동네의 배우들이 가지고 있던 특유의 정서나 느낌이, 미국땅과 미국배우들의 얼굴과 그들의 영어 속에서 배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왕가위를 잊고 지내다가 <일대종사>를 혹하는 마음에 보게 되었다. <일대종사>는 중국의 마지막 쿵후마스터 엽문에 대한 영화였다. 엽문이라는 인물이 영춘권의 정통 계승자이었고, 이소룡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어쩌구 저쩌구 했다는 건 검색해보면 보다 정확하게 알 테니 됐고, 영상만 놓고 보더라도 예전에 열광했던 왕가위 스타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니 이 역시 됐다(?). 차라리 나한테는 다른 것 보다 왕가위가 권법이라는 중화의 상징적인 문화를, 그리고 그 문화의 끝자락 어디쯤에 위치할 인물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의미가 있는 듯 보였다. 반환 전 홍콩의 마지막 시간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이야기하던 그가, 다시 돌아와서 지극히 중국적인 어떤 정신의 마지막 흔적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아아, 뭔가 제법 와 닿는 대사가 있었는데 영화본지 몇 달이 훨씬 지난 상태에서 지껄이다 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ㅠㅠ) 아마도 왕가위 자신도 이런 저런 실험과 경험 끝에 홍콩인과 중국인, 세계인 사이의 어딘가에 정체성을 찾으려 한 게 아닐까 내 맘대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후로 나올 그의 영화들이 예전에 그가 보여준 스타일과 정서를 다시 가져다 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짜 자신의 이야기일 거라는 건 기대할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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